[본문] 갈라디아서 2:1-10 사도 바울은 앞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 예루살렘을 찾아 게바와 야고보 사도를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교회 지도자들의 재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바울과 일행(1-5)]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십사 년 후라는 말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도에 대한 주장에 따라서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하고 십사 년이 지난 시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1장 18절에 연결되는 말씀으로 보아 바울이 회심한 지 14년 후를 뜻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말씀은 사도행전 11장의 정황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기근으로 고난을 받는 유대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구제금을 가지고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널리 알려진 교회의 어른으로서 함께했고, 디도는 수행하는 제자로서 따라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11장 28절을 보면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성령으로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합니다. 이에 제자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합니다. 바울은 이 계시를 따라서, 혹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유력한 자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났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공적인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뜻입니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하지만 예상한대로 예루살렘의 어르신들은 디도에게도 할례를 받으라고 종용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속였지만, 정통 중의 정통인 예수님의 제자이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분명히 밝힙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바울은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가 거짓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고,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격분하여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핵심 이슈는 할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하며, 12절에서는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
말은 표피를 베어버리라는 뜻으로, 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오히려 할례하여 제해 버리라는 과격한 주장입니다.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율법의 껍데기에 복종하면 자유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게 조금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유란 큰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유를 감당하기 벅차기에 오히려 포기하기도 합니다. 자유하기 위해서는 항상 진리 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고, 실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은 바울(6-10)]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울은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라는 말로써, 그 지도자들을 과대평가할 것이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조차 외적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내적인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은 기둥 같이 여겨지는 자라고 말하며 형식도 인정합니다. 그 유력한 자들도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가 행하는 전도 사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고 형식도 더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형식이 아닌 내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9)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두 가지 면에서 자신을 인정했다는 점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음과 같이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사도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 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도 바울이 받은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친교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경쟁자도 아니며 오히려 함께 섬기는 동료임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그리고 한 가지만
부탁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자유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거나, 나의 욕구를 충족하는 일에는 그 무엇에도 제약받지 않겠다는 태도나 사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란,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대로 남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는 나라는 속박에, 나의 욕구라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양식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돕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잠언 14:31은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가장 약한 자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일찍이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내놓는 모습이야말로 기독교가 지금의 위상을 얻을
수 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표현에 그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나 내 자유를 주창하고 추구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기도] [묵상을 돕는 질문] (작성 : 이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