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 페르소나 - hyeondaekadeu peleus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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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디자인의 중요성을 모르는 기업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대목에서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늘 첫 번째로 언급되는 기업이 있다. 한국 디자인계에서 현대카드의 위상은 특별하다. 좋은 디자인을 진지하게 고민해온 기업이자, 디자인이 기업의 전략과 맞물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 어떤 곳보다 강력하게 보여줬다. 지난 수십 년간 유례가 없을 정도다. 디자인과 가장 상관없을 것 같은 금융 기업임에도 ‘현대카드=디자인’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킨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현대카드를 이끌어온 정태영 부회장이 주도한 변화다.

그는 2003년 취임 후 현재까지 현대카드만의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카드 디자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안착시켰으며 디자인 선도 기업으로 수많은 국내외 CEO, 디자이너, 브랜드와 기업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난해에는 다시 한번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전략을 업그레이드하고 PLCC를 비롯해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최근에는 데이터 사이언스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으로 금융업의 범주를 확장하고 있다.

월간 〈디자인〉은 이처럼 오랜 시간 현대카드가 보여준 디자인에 대한 태도에 주목해 2021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기업가치혁신상 수상 기업으로 선정했다. 정태영 부회장은 현대카드의 모든 사업에 걸쳐 있는 건축, 디자인, 브랜드를 관리하는 것은 경영의 일환이자 CEO의 영역이라는 점을 20년 가까이 일관된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그 어떤 디자이너보다 한국 사회와 대중에게 디자인의 중요성을 실천적으로 알리는 데 공헌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 디자인에 대한 정태영 부회장의 생각은 한층 유연하고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물론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져 결코 느슨해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위트 있지만 본질을 꿰뚫는 명쾌함은 여전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이 재능 없는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의 도피처로 변질되었다는 점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미니멀리즘의 본질은 심플함이 아니라 완성도라는 점도 간파하고 있었다. 정태영 부회장과의 공식적인 인터뷰는 2012년 1월 이후 정확히 10년 만이다. 10년 전과 지금,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지난해에는 월간 〈디자인〉이 주관하는 2021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기업가치혁신상 수상 기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 수상보다 더 기뻤어요. 제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해외의 유명 디자인 어워드는 단편적인 프로젝트를 보고 평가하는 데 반해, 월간 〈디자인〉은 현대카드가 지난 20여 년간 쌓아온 태도에 대해 주는 상이라서 그렇습니다. 저희가 받은 상 중 디자인 분야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수상입니다.

2012년 1월호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진행하는 인터뷰입니다. 당시 인터뷰는 현대카드의 디자인 방향성과 사업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영자 입장에서 명쾌한 답을 해주셔서 지금 읽어도 흥미롭습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굉장한 화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과 비교했을 때 기업 차원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나 전략이 확실히 더 고도화되었을까요?
지난 10년간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10년 전에는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기업과 관심이 없는 기업으로 나뉘었다면, 지금은 디자인에 관심 없는 기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디자인은 쓸데없다고 말하는 CEO는 더 이상 없을 것이고요. 당시만 해도 사내에서조차 금융회사가 왜 디자인에 신경 쓰느냐는 분위기였죠. 심지어 ‘정태영이 금융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다만 10년 전에는 “디자인에 왜 신경 써”라고 했다면, 현재는 “디자인에 어떻게 신경 써야 해”라고 묻습니다. 거대 금융 지주회사의 회장님도 관심을 갖고 있죠. 디자인에서 가장 멀리 느껴지던 금융회사마저 신경 쓸 정도라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예전에는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되고 차별화되었지만, 지금은 당연한 일이고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라 게임이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죠. 또 모든 기업이 디자인에 신경 쓰는 듯하지만 브랜딩에 제대로 접목한 사례는 많지 않은 듯합니다.

많은 CEO들이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잘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나요?
네, 굉장히 많이 물어보시죠. 그런데 몇 번 대화가 오가다 보면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사업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적하신 것처럼 아쉬운 게, 디자인에 대한 개인의 관심이나 안목을 뛰어넘어 기업의 전략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디자이너 한두 명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조직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또 소비 생활을 많이 해봐서 많이 알 뿐 안목이 없는 경우도 많아요. 구매를 많이 해본다고 안목이 높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소비를 많이 해보면 많이 알기 때문에 안목이 있다고 착각하게 돼요. 하지만 지갑이 얇아서 소비를 많이 해보지는 않았지만 굉장한 재능이 있는 분들도 분명 있습니다. 통합적인 비즈니스 안목으로 디자인 전략을 세워야 하는데, 취향이나 안목을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자신의 집 커튼을 고르는 데서 끝내야 할 안목을 회사까지 연장하는 경우죠.

기업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자인은 한 기업의 민도民度, 즉 수준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기업 문화가 좋은 곳에서 좋은 디자인이 나옵니다. 구성원의 수준과 안목이 낮은데 디자이너 몇 명이 노력한다고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기업 문화가 후진적이고 민도가 낮은 곳에서 오늘부터 디자인에 신경 쓰겠다고 한들 금방 좋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현대카드는 기업 문화와 워크 스페이스의 관계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입니다. 사옥은 기업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시각적 단서를 주는 곳인데요, 외부인이 여기서 어떤 느낌을 가졌으면 하나요?
10년 전만 해도 사옥을 통해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컨템퍼러리하고 개방적이고, 활동적인 느낌을 받기를 바란다고 쉽게 말씀드릴 수도 있겠지만요. 요즘엔 그저 무색무취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무색무취하게 해달라는 요청은 아이덴티티와 표현의 강박에서 벗어난 경지처럼 느껴집니다. 디자인 철학이나 아이덴티티가 꼿꼿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단계를 다 밟아봤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일 텐데요.
현대카드 초기는 브랜드, 디자인 콘셉트에 대한 자기주장이 과도한 시기였죠. 그렇다고 지금은 느슨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더 탄탄해서 긴장감이 있는 디자인일 수도 있죠. 타임리스하지만 더 고도화된 디자인 전략을 펼치는 중입니다. 다만 콘셉트나 아이덴티티에 대한 주장 같은 것은 좀 내려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카드는 논리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2019년 ‘다빈치 모텔’에서 미니멀리즘의 종언을 언급했습니다. 탈미니멀리즘이라 해도 논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추구할 미학, 사업 전반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처럼 느껴졌습니다.
디자인뿐 아니라 경영이나 마케팅에도 다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제가 예전에는 미니멀리즘이 재능 없는 디자이너의 도피처로 변질되었다고 표현했지만, 재능 없는 클라이언트의 도피처이기도 해요. 디자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는 미니멀리즘이 남용되고 미니멀리즘의 허울만 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저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애착이 많은데, 탈미니멀리즘은 유사 미니멀리즘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 방식 때문에 미니멀리즘처럼 비치는 구석이 있겠지만, 현대카드는 지금까지 논리를 추구했을 뿐 미니멀리즘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어요.

현대카드 페르소나 - hyeondaekadeu peleusona

GPCC(General Purpose Credit Card). 현대카드만의 단독 카드 상품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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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CC(Private Label Credit Card). 상업자 표시 신용카드를 뜻하며, 해당 브랜드 또는 기업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최적화된 혜택을 제공하는 카드다.

미니멀리즘은 심플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완성도를 담보하는 굉장히 어려운 경지입니다. 미니멀리즘의 추구는 완성도를 향한 일종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완성도와 완결성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요즘 미니멀리즘을 내세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보면 그냥 생각 없음만 보여요. 얼마 전에도 본부장들에게 일부 카드 상품의 복잡함과 조잡함에 대해 질타했어요. 선행되는 가치를 포기하고 가치 판단을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할 때 조악함이 생깁니다. 더 이상 미니멀리즘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대신 엄청나게 강조하는 것이 완성도입니다. 카드 플레이트나 상품 설계, 경험에 대한 완성도를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고집은 여전히 살아 있어요. 품질과 경험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거죠. 탈피가 아니라, 실상은 완성도에서 미니멀리즘을 이어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미니멀리즘적 접근을 버리는 게 아니라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현대카드의 디자인 전략과 추구하는 미학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지금까지는 디자인이 현대카드의 조직 문화에 유연성을 불어넣고 브랜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디지털로 트랜짓하면서 이 두 가지 측면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를 강하게 드러내는 디자인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비워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쪽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미니멀리즘에서 탈피한다고 해서 미니멀리즘적 디자인을 안 하는 건 아니고요, 확장성·반복성을 추구하되 엄숙성을 줄이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카드의 디자인에 관해 철학적이거나 사상적인 설명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 체계에 갇혀버리면 유연성과 확장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추구하는 방향이 뭐냐는 질문에도 선뜻 대답을 못 하는 상태가 더 옳다고 봅니다.

몇 달 전에 출간한 〈The Way We Build〉에 관해 여쭤볼게요. 이 책은 전 세계 현대카드 사옥에서 시작해 디자인·뮤직·트래블·쿠킹 라이브러리, 그리고 가파도에 이르기까지 현대카드의 철학과 페르소나를 응집한 29개의 건축과 공간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고 금융회사가 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규모입니다. 건축 아카이브 북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앞으로 건축 프로젝트를 이렇게 많이 하지는 않을 것 같아 이쯤에서 아카이브 북을 내야겠다고 결심하고 5년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건축물은 건축가의 것이기도 하고,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고, 건축주의 것이기도 해요. 그런데 건축가의 아카이브 북은 많지만 건축주 역할을 한 기업 차원의 아카이브 북은 거의 없었어요. 세상에 거창한 건축적 메시지를 던지겠다는 생각으로 낸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이 건축을 할 때 어떤 점을 고민해야 하는지, 현대카드의 여정을 통해 경험담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저희보다 더 큰 기업이 많지만, 건축이 기업 전략과 맞물렸다는 지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완성도와 완결성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요즘 미니멀리즘을 내세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보면 그냥 생각 없음만 보여요.

기업이 사사를 내는 경우는 많지만 건축 부문을 따로 아카이브하는 일은 드물죠. 〈The Way We Build〉는 현대카드의 건축 아카이브 성격을 띠지만, 단지 건축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라 경영 철학과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습니다. 건축가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이 책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가 필자로 참여해서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웃음)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점을 알아보는 분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건축도 발전한다고 봐요. 저희는 사사를 만들 생각이 없어요. 다만 사사의 구성을 해체해서 금융 상품, 마케팅 아카이브 등으로 남길 의향은 있습니다. 사사는 기업의 모든 사건을 연대순으로 축약할 수밖에 없는데 건축, 마케팅, 상품의 아카이브로 나눠본다면 좀 더 유용한 자료를 남길 수 있게 됩니다.

해외에서도 기업이 건축 아카이브를 내는 일은 드문데, 영문판 계획은 없나요?
처음부터 국·영문으로 기획했고요. 얼마 전 타일러 뷜레Tyler Brule 〈모노클〉 창업자가 서울에 왔을 때 이 책을 보여주니 아주 감탄하면서 자신들이 판매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조만간 해외에 영문판을 배포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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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의 주요 임원들이 모인 배민현대카드 협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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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넥슨 대표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함께한 넥슨현대카드 협약 기념 이미지.

디자인, 뮤직, 트래블, 쿠킹에 이어 라이브러리를 추가할 계획은 없나요?
아트 라이브러리를 준비하고 있어요. 2022년 중반에 오픈할 계획입니다. 아트 라이브러리는 디자인보다 건드리기가 쉽지 않고, 기간도 더 오래 걸립니다. 디자인은 100년만 얘기해도 충분할 수 있지만, 아트는 최소 500년에 걸친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는 장르죠. 예술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것은 오만이라, 디자인의 근원을 좀 더 파고든다는 측면에서 지난 100년간의 컨템퍼러리 아트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건축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아트 라이브러리는 어떤 건축물이 될까요?
건축에 힘을 뺄 거예요. 그동안 지은 라이브러리는 책보다 건축물이 더 돋보였어요. 이번에는 귀중하고 무게감 있는 책을 동네 서점처럼 편안하게 접할 수 있게 할 예정이에요. 현대카드가 또 라이브러리를 짓는다고 하면 어마어마한 것을 떠올릴 텐데, 그냥 편안하게 툭 던져놓은 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대카드는 디자인을 사업에 전략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상대적으로 아트에는 관심이 적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아트는 기업 비즈니스에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연계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문화·예술을 아끼고 후원하는 기업 이미지는 만들 수 있겠지만요. 많은 기업이 메세나 차원에서 클래식과 아트를 후원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걸 알고 있어요. 저는 단지 사업자 관점에서는 아트를 기업 전략과 비즈니스에 접목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사업적 활용 측면에서는 회의적이라 아트보다는 디자인에 더 관심이 많았고요. 같은 이유로 클래식 음악에 관련한 후원과 마케팅을 접었습니다.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현대카드와 접점이 많지 않아서요. 현대카드가 음악이나 아트를 좋아한다, 사랑한다기보다는 비즈니스에 충실하려는 관점으로 본 거죠. 현대카드가 디자인에 신세진 게 많아서, 기여했다고 하면 좀 미안한 생각도 들어요.(웃음)

뉴욕 모마MoMA와는 오랫동안 후원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지난 15년간 뉴욕 모마와는 아주 돈독하게 지냈습니다. 특히 미디어,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 교류가 많았습니다. 전방위에 걸친 모마의 네트워크를 통해 도움을 많이 받았죠. 디자인과 아트 라이브러리는 그들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거예요. 몇 년 전 글렌 로리Glenn Lowry 모마 관장을 만나 현대카드는 앞으로 소유하거나 지속할 수 없는 예술에만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어요. 컬렉션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작품에만 후원이 집중되는 현실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까요?(웃음) 현대카드만이라도 퍼포먼스처럼 한순간으로 끝나는 예술에 후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더니 글렌 로리 관장이 아주 심각하게 여기더군요. 모마가 현대카드를 존중하는 것도 가끔씩 정색하면서 이런 진심 어린 발언을 하기 때문이죠.

모마의 마리-조세 & 헨리 크라비스 스튜디오Marie-Joseee and Henry Kravis Studio 벽면에 ‘Media and Performance at MoMA ia made possible by Hyundai Card’라고 쓰여 있습니다.
재개관 후 라이브 프로그램과 퍼포먼스를 위한 공간인 마리-조세 & 헨리 크라비스 스튜디오가 생겼는데, 현대카드는 이 공간에서 진행하는 모든 미디어와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단독 후원합니다.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영역임에도 제대로 된 스폰서가 없거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라이브 & 퍼포먼스 아트에 현대카드가 적극적으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현대카드의 마지막 단계는 오로지 한국 아티스트에 대한 후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한국 기업이니까 한국 아티스트만 후원하겠다는 태도는 후진적이라고 여겨 국경을 불문하고 후원했지만, 이제 그런 역할은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오직 한국 아티스트의 모마 입성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실패했다고 여기는 건축, 디자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가파도와 올레길. 지자체와 함께 진행한 일들인데,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취지를 살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설계자와 운영자, 사용자의 생각이 다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죠. 또 일종의 가성비적 측면에서 아무리 좋은 건축, 디자인이라도 완성되기까지 과정이 힘들면 결과물도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100시간 정도 투자하면 될 만한 일을 5000시간을 들여 완성했다면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봐요. 현대카드 내부적으로는 잇 워터와 스튜디오 블랙이 ‘반성해야 하는 시도’로 기록되었습니다. 제가 제안한 프로젝트 중 실패는 디지털 러버였어요. 이름부터 디자인, 카피까지 거의 총감독 역할을 했고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요. 심지어 팬데믹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한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콘셉트의 상품이라 자신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플레이트 디자인을 안 고르게 하면 화낼 것 같지만, 디지털 러버를 선보인 2020년만 해도 카드를 고르라는 것도 낯설고, ‘혜택을 많이 준대’가 아니라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것도, 혜택도 1층, 2층, 3층이 있다고 하지, 그런 모든 것이 어렵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상품 설계가 복잡해 하나의 제품으로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던 게 문제였습니다.

건축, 광고, 브랜드, 디자인을 직접 챙기시는데 결국 이런 일이 한 기업의 브랜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텐데요.
안 챙겨도 돼요. 안 챙겨도 되지만, 그러면 아마 브랜딩은 없을 거예요. CEO가 챙길 때 브랜드가 공고해집니다. 배달의민족도 김봉진 의장이 직접 챙기니까 에지가 생겼죠. 물론 CEO가 직접 챙긴다고 제대로 브랜딩이 되는 건 아니지만 필수예요. 브랜딩은 CEO나 책임자의 머릿속에서 통합되어야 제대로 굴러가는데, 시스템으로 진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에요. 브랜드가 있어야만 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카드는 지금까지 견고하고 위트 있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왔습니다. 다이브를 통해 공개된 오버 더 레코드 강의에서 세일즈-마케팅-브랜딩(페르소나 매니지먼트) 순으로 고도화된다고 설명하셨죠. 현대카드에서는 이 과정이 어떻게 작동될 수 있었나요?
가장 큰 결정이 브랜드 본부를 독립시킨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브랜드 본부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 많지 않을 거예요. 마케팅과 합쳐져 있거나 디자인까지 포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총괄적 마케팅과 실행적 마케팅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일즈와 마케팅, 브랜드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단기적인 실적이 장기적인 비전을 잡아먹게 되어 있어요. 실질적인 것이 개념적인 부분을 흔드는 거죠. 하지만 부서를 각각 따로 만들면 인원도 필요하고 돈도 드니까 세일즈, 마케팅, 브랜딩을 통합하려고 듭니다. 그럴 땐 차라리 세일즈든 마케팅이든 브랜드든 딱 한 가지만 집중하는 게 나아요. 안 할 수는 없으니 통합해서 진행하려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결정입니다. 근본적으로 세일즈, 마케팅, 브랜딩 이 세 가지는 각자 역할이 다른데 합쳐지면 그냥 영업이 모든 것을 관장하게 됩니다. 단기적 실적에만 연연하고 브랜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안 할 수가 없으니 대개 절충하게 되는데,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브랜딩을 절충했다고 믿게 되니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안 하면서 하고 있다고 믿는 게 최악이죠. 차라리 집중해서 세일즈만 할 거야, 브랜딩은 안 해, 이렇게 결정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면 오히려 괜찮아요. 무엇을 하고, 안 하는지를 알고 있으면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질문을 던지게 되니까요.

현대카드는 이제 단순한 금융회사가 아니라 데이터 사이언스 기업임을 선언했습니다. 카드사가 가진 데이터를 가공·활용해 수익을 내는 데이터 기업으로의 체질 전환이라는 파격적인 발상입니다.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고퀄리티 데이터는 카드사가 가장 많이 갖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코닥은 사진 데이터가 가장 많은 기업이었는데 인스타그램적 발상을 못 하고 필름 판매만 생각하다가 파산했어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데이터 사이언스에 지금까지 5000억 원 이상을 투자해왔습니다. 이 분야에서 현대카드가 주요 플레이어로 부상하고 있어요. 데이터 사이언스를 시작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용도를 미리 결정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돈벌이가 되는지만 연구하면 발전이 없어요. 데이터 사이언스는 이후 PLCC라는 완벽한 용도가 생겨 꽃을 피웠고요. 앞으로 용도는 엄청나게 늘어날 거예요. 처음부터 용도를 정해두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확장성이 생겼죠. 또 21세기에 성장하고 살아남는 기업은 공통점이 훨씬 많습니다. 20세기에는 에너지 기업과 금융회사의 공통점이 거의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데이터 사이언스라는 핵심 역량을 기반으로 한 기업은 업종 불문하고 공통점이 훨씬 많아요. 어느 분야에 접목하고 활용하느냐만 다를 뿐 데이터 사이언스의 승자가 살아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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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사이언스의 활용을 극대화한 것이 현대카드의 데이터 동맹 ‘도메인 갤럭시’입니다. 대한항공, 스타벅스, 배민, 무신사, 이마트 등 각 분야 최고 기업과 손잡은 PLCC 출시로 구체화되었고요.
저는 항상 블루오션은 바다 건너 저편에 있지 않고 바로 이곳에 있다고 봅니다. 카드 상품을 연회비 10만 원, 5만 원짜리로 나누지 말고 스타벅스, 대한항공 등 파트너사별로 나눠보자,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게 PLCC입니다. 기존 시장이라도 관점을 달리하면 그게 바로 블루오션입니다. 5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당시엔 PLCC를 몇 군데나 설득할 수 있을지 예상 못 했죠. 스타벅스, 대한항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개 진행했고 곧 넥슨과도 합니다. 우리가 예상한 기업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함께할 만한 기업을 더 이상 찾기 힘들 정도예요. 지난해 8월 말 기준 국내 8개 전업 신용카드사가 출시한 PLCC는 총 75종, 발급 매수는 464만 장인데 그중 현대카드가 PLCC 발급량 기준 9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카드사가 PLCC라고 우기는 것은 실상 제휴 카드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인정하더라도 점유율이 6%밖에 안 됩니다.

앞으로 더 개발하고 싶은 카드 상품이나 카테고리는 없나요?
저는 카드업에서 좀 벗어나는 게 목표예요. 데이터 사이언스를 기반으로 금융과 상관없는 분야에서 매출을 올리는 게 그다음 목표입니다. 디지털 컴퍼니로 가는 거죠.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예전에는 하루에 미팅을 6~10개씩 했는데,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스스로 게으르다고 여겼습니다. 요즘엔 회의나 미팅을 줄이고, 이메일로 보고받을 때가 많아요. 지난 20여 년간 쌓아온 관성이라는 게 있는데, 일반적인 결정이라면 크게 어긋나지 않아요. 대신 개인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있어요. 그래야 다음 스텝을 고민할 수 있어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 저만 할 수 있는 생각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려면 실무에 깊이 관여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각자 대표라는 제도도 만들었고요. 지금은 현대카드가 IT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길목에 있습니다. 금융에서 벗어나 디지털 컴퍼니로 가겠다는 결정은 CEO만이 내릴 수 있는 일이죠.

스마트폰 케이스에 MX블랙을 넣고 다니시는데, 주로 사용하는 카드인가요?
블랙과 MX블랙 2개를 주로 사용해요. MX블랙은 연회비가 15만 원인데 M포인트도 쌓을 수 있고 X할인도 돼서 좋아요.(웃음) 제가 카드를 많이 긁어서 포인트가 몇만 점 쌓여 있죠. 블랙은 제가 1번이고, 〈오징어게임〉의 이정재 배우에게는 456번을 발급해드렸습니다.(웃음)

스스로에게 일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체스판, 경기장. 회사에 나오면 이 판을 어떻게 움직여서 사업을 하고 경쟁에서 이길까, 그 고민만 합니다.

왜 돈을 많이 버시는지 알겠습니다.(웃음)
진짜예요. 저는 취미로 바둑이나 체스를 하는 분을 보면 일이 곧 게임인데 또 무슨 경기를 하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취미가 별로 없는 편이죠.

마지막으로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어 하셨는데,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CEO로 알려진 게 몹시 억울하다고요.(웃음)
디자인을 중시하는 사업가로 알려진 게 불편하고 부당한 일이에요. 저는 금융 분야에서 업적이 더 많은데 억울해요. 하루 종일 금융 관련 업무를 보고 그쪽만 바라보고 사는데 말이죠. 그래서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가 그런 편향된 시각을 더욱 공고히 할 것 같아 우려됩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