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디자인의 중요성을 모르는 기업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대목에서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늘 첫 번째로 언급되는 기업이 있다. 한국 디자인계에서 현대카드의 위상은 특별하다. 좋은 디자인을 진지하게 고민해온 기업이자, 디자인이 기업의 전략과 맞물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 어떤 곳보다 강력하게 보여줬다. 지난 수십 년간 유례가 없을 정도다. 디자인과 가장 상관없을 것 같은 금융 기업임에도 ‘현대카드=디자인’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킨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현대카드를 이끌어온 정태영 부회장이 주도한 변화다. 그는 2003년 취임 후 현재까지 현대카드만의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카드 디자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안착시켰으며 디자인 선도 기업으로 수많은 국내외 CEO, 디자이너, 브랜드와 기업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난해에는 다시 한번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전략을 업그레이드하고 PLCC를 비롯해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최근에는 데이터 사이언스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으로 금융업의 범주를 확장하고 있다. 월간 〈디자인〉은 이처럼 오랜 시간 현대카드가 보여준 디자인에 대한 태도에 주목해 2021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기업가치혁신상 수상 기업으로 선정했다. 정태영 부회장은 현대카드의 모든 사업에 걸쳐 있는 건축, 디자인, 브랜드를 관리하는 것은 경영의 일환이자 CEO의 영역이라는 점을 20년 가까이 일관된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그 어떤 디자이너보다 한국 사회와 대중에게 디자인의 중요성을 실천적으로 알리는 데 공헌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 디자인에 대한 정태영 부회장의 생각은 한층 유연하고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물론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져 결코 느슨해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위트 있지만 본질을 꿰뚫는 명쾌함은 여전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이 재능 없는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의 도피처로 변질되었다는 점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미니멀리즘의 본질은 심플함이 아니라 완성도라는 점도 간파하고 있었다. 정태영 부회장과의 공식적인 인터뷰는 2012년 1월 이후 정확히 10년 만이다. 10년 전과 지금,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지난해에는 월간 〈디자인〉이 주관하는 2021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기업가치혁신상 수상 기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2012년 1월호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진행하는 인터뷰입니다. 당시 인터뷰는 현대카드의 디자인 방향성과 사업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영자 입장에서 명쾌한 답을 해주셔서 지금 읽어도 흥미롭습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굉장한 화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과 비교했을 때 기업 차원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나 전략이 확실히 더 고도화되었을까요? 많은 CEO들이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잘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나요? 지적하신 것처럼 아쉬운 게,
디자인에 대한 개인의 관심이나 안목을 뛰어넘어 기업의 전략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기업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대카드는 기업 문화와 워크 스페이스의 관계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입니다. 사옥은 기업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시각적 단서를 주는 곳인데요, 외부인이 여기서 어떤 느낌을 가졌으면 하나요? 무색무취하게 해달라는 요청은 아이덴티티와 표현의 강박에서 벗어난 경지처럼 느껴집니다. 디자인 철학이나 아이덴티티가 꼿꼿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단계를 다 밟아봤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일 텐데요. 현대카드는 논리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2019년 ‘다빈치 모텔’에서 미니멀리즘의 종언을 언급했습니다. 탈미니멀리즘이라 해도 논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추구할 미학, 사업 전반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처럼 느껴졌습니다.
GPCC(General Purpose Credit Card). 현대카드만의 단독 카드 상품을 뜻한다. PLCC(Private Label Credit Card). 상업자 표시 신용카드를 뜻하며, 해당 브랜드 또는 기업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최적화된 혜택을 제공하는 카드다. 미니멀리즘은 심플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완성도를 담보하는 굉장히 어려운 경지입니다. 미니멀리즘의 추구는 완성도를 향한 일종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니멀리즘적 접근을 버리는 게 아니라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몇 달 전에 출간한 〈The Way We Build〉에 관해 여쭤볼게요. 이 책은 전 세계 현대카드 사옥에서 시작해 디자인·뮤직·트래블·쿠킹 라이브러리, 그리고 가파도에 이르기까지 현대카드의 철학과 페르소나를 응집한 29개의 건축과 공간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고 금융회사가 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규모입니다. 건축 아카이브 북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완성도와 완결성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요즘 미니멀리즘을 내세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보면 그냥 생각 없음만 보여요. 기업이 사사를 내는 경우는 많지만 건축
부문을 따로 아카이브하는 일은 드물죠. 〈The Way We Build〉는 현대카드의 건축 아카이브 성격을 띠지만, 단지 건축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라 경영 철학과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습니다. 건축가뿐 아니라 기업에서도 이 책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가 필자로 참여해서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웃음) 해외에서도 기업이 건축 아카이브를 내는 일은 드문데, 영문판 계획은 없나요?
양사의 주요 임원들이 모인 배민현대카드 협약식. 이정현 넥슨 대표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함께한 넥슨현대카드 협약 기념 이미지. 디자인, 뮤직, 트래블, 쿠킹에 이어 라이브러리를 추가할 계획은 없나요? 지금까지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건축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아트 라이브러리는 어떤 건축물이 될까요? 현대카드는 디자인을 사업에 전략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상대적으로 아트에는 관심이 적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뉴욕 모마MoMA와는 오랫동안 후원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모마의 마리-조세 & 헨리 크라비스 스튜디오Marie-Joseee and Henry Kravis Studio 벽면에 ‘Media and Performance at MoMA ia made possible by Hyundai Card’라고 쓰여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여기는 건축, 디자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건축, 광고, 브랜드, 디자인을 직접 챙기시는데 결국 이런 일이 한 기업의 브랜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텐데요. 현대카드는 지금까지 견고하고 위트 있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왔습니다. 다이브를 통해 공개된 오버 더 레코드 강의에서 세일즈-마케팅-브랜딩(페르소나 매니지먼트) 순으로 고도화된다고 설명하셨죠. 현대카드에서는 이 과정이 어떻게 작동될 수 있었나요?
현대카드는 이제 단순한 금융회사가 아니라 데이터 사이언스 기업임을 선언했습니다. 카드사가 가진 데이터를 가공·활용해 수익을 내는 데이터 기업으로의 체질 전환이라는 파격적인 발상입니다. 데이터 사이언스의 활용을 극대화한 것이 현대카드의 데이터 동맹 ‘도메인 갤럭시’입니다. 대한항공, 스타벅스, 배민, 무신사, 이마트 등 각 분야 최고 기업과 손잡은 PLCC 출시로 구체화되었고요. 앞으로 더 개발하고 싶은 카드 상품이나
카테고리는 없나요?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스마트폰 케이스에 MX블랙을 넣고 다니시는데, 주로 사용하는 카드인가요? 스스로에게 일이란 무엇일까요? 왜 돈을 많이 버시는지 알겠습니다.(웃음)
마지막으로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어 하셨는데,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CEO로 알려진 게 몹시 억울하다고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