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프랑스혁명 - lu-i 16se peulangseuhyeogmyeong

[더,오래] 강정영의 이웃집 부자이야기(13)

루이 16세 프랑스혁명 - lu-i 16se peulangseuhyeogmyeong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수백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한 절대 왕정을 무너뜨려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서도록 만든 단순한 하나의 혁명 이상이었다. [중앙포토]

1789년 프랑스 혁명,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혁명 이상이었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한 절대 왕정을 무너뜨려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서도록 만든 대사건이다. 혁명이란 일반적으로 기득권층과 지배계급을 단시일 내에 급진적으로 때로는 잔인하게 몰락시키고 교체한다. 혁명 전야엔 공통으로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빈곤, 재난, 그리고 개혁의 실패가 전조 증상으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루이 16세는 순수했으나 소심했다. 그는 사냥을 좋아했고 자물쇠 만드는 취미에 빠져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다.

파리 동남쪽으로 55km 떨어진 퐁텐브로이는 아름다운 정원과 드넓은 숲으로 이루어진 하궁이다. 그곳은 왕들이 좋아하던 사냥터였고 나폴레옹도 말년에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는 우유부단해 누구에게나 조언을 구했고,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물음을 측근들에게 자주했다고 한다.

그가 개혁을 위해 임명한 재무장관 튀르고는 자신의 봉급을 절반으로 깎으면서 재정 파탄을 피하고 증세 부담을 없애기 위해 세출 절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신 세금을 내지 않았던 귀족 등 특권층에는 과세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왕비 앙투아네트부터 반대했고, 귀족과 소위 기득권층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간다. “세금 내려는 사람은 없고 세금 쓰려는 사람만 많다”는 당시 떠돌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만약 그가 강력한 국왕 밑에서 개혁에 성공했다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

농민은 각종 세금 부담으로 등골이 빠지는데, 귀족은 사냥을 즐기기 위해 영지에 비둘기와 토끼를 방사해 농작물에 막심한 손해를 끼쳐 불만이 쏟아졌다. 만약 귀족이 누렸던 수렵권, 토지 강제 사용권, 기타 독점적인 이권 등 특권을 폐지하고 농민의 과중한 부담을 덜게 해주는 개혁에 성공하였다면 루이 16세도 비극적인 최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이 16세 프랑스혁명 - lu-i 16se peulangseuhyeogmyeong

불만과 억압이 극에 달해 폭발한 것이 바스티유 감옥 함락이다. 바스티유 성탑은 봉건제의 상징이자 불법 투옥의 악명으로 민중의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중앙포토]

불만과 억압이 극에 달해 폭발한 것이 바스티유 함락이다. 바스티유 성탑은 봉건제도의 상징이었고 불법투옥의 악명으로 민중의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7월 14일 온종일 사냥으로 지쳐 고단하게 잠에 떨어졌던 왕은 아침에 이 소식을 측근에게 전해 들었다. “반란인가”라는 물음에 그의 신하는 “혁명이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본격적인 혁명의 서막에 불과했다. 외국인 용병마저 궁정으로 피신하는 등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계속된다. 단두대는 성난 군중이 귀족을 심판하기 위해 들이대는 무서운 공포의 잣대가 되어 갔다. 단두대는 당시 의사였던 조셉 길로틴이 고안했다. 사람이 칼로 목을 베는 경우에 생기는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만든 장치였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호화롭게 살면서 민중을 억압한 데 대한 극심한 분노가 잔학한 보복으로 표출됐다. 당시엔 밀고가 시민의 의무였고 단두대가 미덕의 재단이었다. 약 4만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특히 귀족 계급에서 희생자가 많았다. “보라, 센 강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아아, 너무 많은 피가 흐르고 있다. 이제 진정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관용을 요구하라.” 당시의 혁명가 당통이 호소한 말이다.

1793년 1월 21일 마침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최후를 맞이한다. 놀라운 것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오르면서 “짐은 죄 없이 죽는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인민을 보살펴야 할 왕이 그들의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삶의 실상에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마디였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죽어야 했는지 모른다.

루이 16세 프랑스혁명 - lu-i 16se peulangseuhyeogmyeong

촛불집회가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모습. 억눌리고 불만이 쌓인 계층이 많으면 프랑스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중앙포토]

얼마 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국무총리에게 촛불 시위를 ‘촛불 혁명’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을 했다. “본인 생각으로는 혁명으로 본다”는 답변이 나왔다. 그 답변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국민 다수가 혁명적 변화와 조치를 요구한 행위로 본 것이다.

지난 정권의 대통령들이 중형을 선고받고, 측근 실세들도 구속됐다.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정치적인 행위를 보는 잣대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속된 어느 핵심참모는 “과거에는 관행이던 것이 지금은 죄가 되었다”고 했다. 억울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루이 16세의 한가한 상황 인식과 다름없다고 할 것 같다.

억눌리고 불만이 쌓인 계층이 많으면 프랑스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기득권층과 가진 자가 개념 없이 예전과 같이 특권을 행사하고 누리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 어느 재벌 총수 일가의 갑질이 사회적인 공분을 사고, 적지 않은 재벌 총수가 법정에 불려 나가고 구속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세계의 부자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가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기업들은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공적인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한 약속과 행위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나와 기업이 이만큼 큰 것이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 덕분이라는 철학이 담겨있다고 본다.

양극화, 부의 대물림, 금수저·흙수저 하면서 계층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가진 자가 나누려 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사회적 갈등과 긴장을 줄이고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역사적인 사건이 주는 엄혹한 교훈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강정영 청강투자자문 대표

루이 16세 프랑스혁명 - lu-i 16se peulangseuhyeogmyeong

1789년 7월 17일 금요일, 루이 16세가 파리를 방문하던 날이다. 바스티유 요새를 철거하는 모습을 귀족들이 지켜본다. 1383년에 파리 동쪽에서 오는 적을 막으려고 지은 바스티유 요새는 406년만에 철거당하기 시작했다. 돌은 바스티유 감옥 모형을 새겨 전국에 보급하거나, 콩코르드 광장 앞의 다리를 짓는데 썼다.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요새 정복’은 프랑스 혁명의 표시이며 상징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1년 후 그날에 국민 화합을 기원하는 전국연맹제를 열었고, 1880년에는 국경일로 정했다. 이 사실을 아는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려는 듯이 종래의 역사가들은 잊지 않고 루이 16세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에서는 시위대가 “전제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강제로 열고 죄수를 구해주었다. 그날 사냥터에 다녀온 루이 16세가 곤히 잠들었을 때, 라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이 급히 그를 깨웠다. 공작은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요새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루이 16세는 “반란이 일어났소?”라고 물었고, 공작은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렇게 흘러간다.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으로 흐르고, 루이 16세를 시작으로 수많은 정치지도자와 반체제인사들을 처형하고 나서, 마침내 공포정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 차례가 된다. 몇 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베스피에르를 아침에 체포하고 당일에 고소해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이튿날 일당들과 함께 처형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이 16세와 시종 리앙쿠르 공작의 대화는 한 체제의 종말, 19세기부터 20세기의 표준화한 역사가 정리했던 종말을 예고하는 장면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왕조의 미래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엄중한 시국에 왕이 철모르게 사냥이나 다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극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설서는 이제까지의 수많은 연구성과를 종합해서 이 이야기를 허구라고 평가한다.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루이 16세가 보고를 받자마자 ‘반란’이냐고 물은 이유를 먼저 설명했다. 왕은 여느 반란처럼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도 군대를 동원하면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리앙쿠르 공작은 즉시 진압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는 뜻으로 ‘혁명’이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들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런 의문이 든다. 리앙쿠르 공작은 낮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보고만 받았을 텐데, 어떻게 ‘혁명’인 줄 알았을까?

‘혁명’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한 연구 이후 천체 운행에 관한 지식이 변화하면서 ‘혁명’이라는 말이 쓰였고, 17세기에 영국에서 크롬웰의 독재가 끝나고 왕이 귀환하는 과정을 ‘혁명’으로 표현하면서 정치적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게다가 17세기 말부터 새로운 문학의 범주로 ‘혁명의 역사’가 나오기 시작했으므로 ‘혁명’은 지식인들의 어휘에도 포함되었다.

출처 :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

그리고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대서양 양쪽의 나라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났고, 아메리카 혁명이 성공을 거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1789년 7월 14일 밤이나 15일 아침에 리앙쿠르 공작이 ‘혁명’이라고 말할 가능성은 있었다. 실제로 장 마리 굴모는 1967년에 ‘정치 혁명의 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역사가들은 루이 16세가 7월 14일 낮에 사냥터에 다녀왔기 때문에 곤히 자고 있었다는 근거로 루이 16세의 ‘사냥수첩’을 제시했다. 과연 그의 수첩에서 7월 14일 “Rien”(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에서는 며칠 동안 계속 방화와 약탈이 일어났고, 14일에는 시위대가 앵발리드[군원호원]에서 소총을 3만 정이나 약탈한 후 화약을 구하려고 아르스날[병기창]로 갔다가 바로 옆 건물인 바스티유 요새의 군인들과 전투를 벌이고 이겼다. 사태가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왕은 한가하게 사냥이나 다니고, 수첩에 “한 마리도 못 잡았음”이라 쓰고 곯아떨어졌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독자가 “망할 수밖에 없는 왕정”을 예상하게 만든다. 이러한 역사를 ‘목적론적 역사’라 부른다. 당시 모든 사람이 선택한 것이 모두 우리가 나중에 알게 될 종점을 향한다고 쓰는 역사. 또는 역사가가 종점으로 정한 곳과 그곳으로 가는 가는 길목을 독자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역사. 그러나 가장 오래된 학문인 역사학은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배우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면서 목적론적 역사의 위험성을 자각했다.

혁명의 빛으로 볼 때, 구체제는 무조건 나쁜 것이므로 타파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목적론에서 벗어난 역사가들은 혁명이 나쁜 구체제를 발명했다고 깨달았다. 절대군주정이 후원하고 장려한 아카데미 같은 학술기관은 18세기에 파리와 지방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농학회는 영국의 선진기술을 배우고 발전시켰다. 책 발간량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에 검열관의 수도 17세기에 네 명에서 1769년에 128명이나 되었다. 수많은 책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포함하려고 노력한 결과다.

이렇게 구체제 시기에 절대군주정은 근대화를 시작했고, 계몽주의도 구체제의 산물이며, 민주주의 원칙을 갈망하는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체제가 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혁명을 낳았다는 관점에서 혁명사의 전후 맥락을 올바로 찾기 시작했다.

다시 왕의 사냥에 관한 기록을 보기로 하자. 장 클레망 마르탱은 직설적으로 “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는 사냥터에 가지 않았다”고 썼다. 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는지 모르겠지만, 필리프 르죈의 연구는 참조할 만하다. 르죈은 루이 16세가 열한 살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혁명기에도 계속 똑같은 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다고 말한다. 르죈은 그의 수첩에서 7월 14일 일주일 전부터 일주일 후까지의 기록을 제시한다. 거기서 우리는 사슴 잡은 얘기, 단지 “아무 일도 없다”는 얘기, 또는 “아무 일도 없다”와 함께 베르사유 궁이나 밖에서 누구를 만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7월 12일에는 “아무 일도 없음. 네케르 해임”을 기록하고, 13일과 14일에는 잇달아 “아무 일도 없음”이라 기록했다. 역사가들은 시위대가 바스티유 요새를 정복하고, 그날이 프랑스의 국경일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루이 16세가 그날에 과연 무엇을 했는지만 부각시켰다. 르죈은 루이 16세가 7월 12일에 사냥터에 가지 않았고, 네케르를 사냥했다고 말하면서 목적론적 역사의 잘못을 에둘러서 멋지게 지적했다.

그는 루이 16세가 하루 한 줄, 한 달에 기껏해야 한쪽의 기록을 남겼지만, 다음 달에 몇 가지 기록을 모아서 정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7월 14일의 기록은 8월 중에 정리한 것이며, 그날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에서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역사가들이 사냥과 중요한 약속이나 국사를 함께 정리한 수첩을 '사냥수첩'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가 풀렸다. 이름을 짓는 일이 자칫하면 굉장한 오해를 낳는다는 교훈도 얻었다.

르죈은 18세기에 자전적인 글을 남긴 사람들의 글에서도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사건에 반드시 꼽히는 바스티유 요새 정복이 흔적을 남기지 않은 예를 소개했다. 우리도 가끔 “내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듯이, 당대인들 가운데 혁명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말한 사람이 전혀 없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하지만 바스티유 요새를 정복한 날이 프랑스 국경일이 될 줄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적론적 역사를 읽을 때는 무척 조심해야 하며, 되도록 우리가 직접 사건의 뒤를 추적하면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참고문헌

장 클레망 마르탱 외,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주명철 옮김, 여문책, 근간)

Jean Marie Goulemot, “Le mot ‘Révolution’ et la formation du concept de ‘Révolution politique’ (fin XVIIe siècle)”, Annales historiqu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39(190): pp. 417-444.

Philippe Lejeune, “Rien”: journaux du 14 juillet 1789, in Jacques Neefs et al., Le Bonheur de la littérature, P.U.F., 2005, pp. 277-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