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과 한음 나이차이 - oseong-gwa han-eum naichai

오성과 한음은 죽마고우의 대명사다.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우정을 나눈 대표적인 우리나라 역사 인물로 두 사람이 첫손 꼽힌다. 두 사람이 어릴 때 온갖 기발한 장난을 쳤거나 어른을 탄복시키는 기지(機智)를 발휘한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두 사람의 어릴 적 일화들은 지금도 아동용 책으로 수없이 만들어져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릴 때 서로 몰랐다면?

오성(鰲城) 혹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출생연도는 1556년(명종11년)이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출생연도는 1561년(명종16년)이다. 일단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난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어릴 때 다섯 살이면 큰 차이다. 같이 어울려 놀기엔 나이 차이가 꽤 크다. 다섯 살과 열 살, 혹은 열 살과 열다섯 살이 같이 노는 걸 상상해보면 된다. 이거 뭔가 이상하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어울려 놀 수도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럴 수 있다. 오성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라면서 어려 한때 부랑아들의 우두머리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어머니의 간곡한 훈육에 개과천선해 학문에 전념해 성균관에 들어갔다고 한다. 반면 한음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수재였고 모범생이었다. 열아홉 살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였으니 조숙했다고 할 수 있다. 나이 들도록 철없이 살던 오성과 유달리 조숙한 한음이라면 서로 어울릴 수도 있지 않을까? 둘이 절대 친구가 될 순 없다고 장담하긴 어렵겠다.

그러면 일단 둘이 같은 지역에 살기는 했을까? 오성이 태어난 곳은 서울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 지금 남창동ㆍ서소문동ㆍ태평로ㆍ남대문로 일대)이다. 본가는 포천이다. 반면 한음의 출생지는 서울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을지로·충무로·남대문로 일대)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경기도 양평이다. 다만 한음의 외가 쪽 본가가 마침 포천이다. 어쩌면 두 사람이 어릴 때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서울 안이라 해도 아이들이 이웃 동네까지 가서 놀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혹시 포천에서 만났을 수도 있다. 그래도 둘이 어릴 때 친구라기엔 영 찜찜하다. 오성과 한음의 우정을 다룬 설화엔 하나 같이 둘이 죽이 척척 맞는 명콤비처럼 나오는데 다섯 살 나이 차이가 아무래도 걸린다. 어릴 땐 오뉴월 하루 땡볕이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고 해도 엄연히 동네가 다른데 매일 만나 놀았다고 보는 것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럼 방향을 돌려 두 사람의 배경을 살펴보자.

오성 이항복은 경주 이씨에 서인(西人)에 속하는 사람이다. 반면 한음은 광주(廣州) 이씨에 동인(東人)에서 갈라진 남인(南人)의 일파였다. 한음이 어렸을 땐 동인에 속했었다. 즉, 두 사람은 배경 상으로는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어린애들이 서인 동인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당시엔 서로 내왕과 혼인도 안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다. 어린애들이라고 해도 서로 어울려 놀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한다. 알면 알수록 점점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친구였을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이 죽마고우의 대명사처럼 온갖 설화에 등장하는 걸까? 둘의 공통점을 살펴보니 둘이 과거에 급제한 해가 마침 1580년(선조13년)으로 같다. 한음은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같은 해 오성은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험은 아니었지만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받았다. 입사동기 쯤 된다고 보면 될까? 마침 두 사람은 이듬해 선조의 ≪강목 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율곡 이이(李珥)가 추천한 5명에 나란히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 질씩을 하사받고 옥당에 들어갔다. 아마도 이때부터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당파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한 이불을 덮고 잘 만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으며 당파를 초월해 나라를 위해 협심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음이 죽자 오성이 직접 염(殮)을 했다고 하니 그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오성은 실록에도 장난을 좋아하고 익살과 기지가 뛰어난 사람으로 나오고 한음은 반듯한 수재형 인재로 나온다. 오성이 청백리로 이름을 날린데 반해 한음은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여러 모로 스타일이 달랐지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며 정사를 돌보았다.

물론 과거 급제 이전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나중에 인조반정의 주역이 된 묵재(默齋) 이귀(李貴,1557년~1633년)가 같은 서인인 이항복과 소년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공교롭게도 한음과 동문수학한 사람이다. 묵재와 한음은 윤우신(尹又新)에게 함께 배웠다. 따라서 이귀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서로 교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한음이 최소 1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혹시 이귀와 이항복의 어릴 때 일화가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바뀐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두 사람의 당파를 초월한 우정은 당대에도 이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두 사람을 우정의 상징으로 만들고 세간을 떠돌던 온갖 개구쟁이들 이야기나 우정의 설화들이 다 오성과 한음의 어릴 때 이야기로 둔갑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결론적으로 오성과 한음의 우정은 만고에 칭송받을 만큼 두터웠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이어져온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고 교훈적인 어린 오성과 한음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면 어떠랴만 이왕이면 진실은 진실대로 밝혀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몇 자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