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16절 - sadohaengjeon 3jang 16jeol

[본문] 사도행전 3:11-26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11-16절)]
오늘 본문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오후3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美門)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선천적 지체장애인이었던 40여 세 된 사람을 고쳐 준 후의 이야기,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을 충만되어서 행한 2장의 설교입니다.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지체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제 발로 거기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메어다가 그곳에 앉혔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장애인의 가족들이었을 수도 있고, 친구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생 구걸하는 인생을 살았던 지체장애인의 오른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평생 한 번도 제 발로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고침 받은 지체장애인이 수없는 날을 미문 앞에서 구걸했을지라도, 그 문은 그에게는 결코 미문, 아름다운 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더욱 돋보이게만 해 주는 아름답지 않은 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가 그 미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문이 열린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40년 이상을 제 발로 걸을 수 없었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자,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붙잡다’라는 동사는 ‘어떤 것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꼭 붙들어 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나은 사람은 깊은 감사의 표시로 베드로와 요한을 꼭 껴안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평생 걷지 못하고, 구걸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준 것에 대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감사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들의 고백대로 은이나 금이 없었습니다. 또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혹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적고, 작고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품으면, 우리도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주님과 우리의 주님이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지체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자 많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 베드로는 구걸하는 지체장애인에게는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마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율배반적으로 들리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 자신들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또한 이 치유의 일이 나게 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니, 주목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랐다가 40일 만에 내려오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출애굽 할 때 가지고 나온 금을 모아서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고는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지고 있던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고 다시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왔는데,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빛이 다 사라질 때까지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에만 주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얼굴을 가렸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대왕의 손자인, 헤롯(아그립바1세)왕이 나오는데, 그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주목받으려고 하다가, 벌레에게 먹혀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도,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주목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13-1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신들의 뿌리와 같은 조상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구석구석에 개입해 주신 믿음의 족장들이라고 여기고, 자신들이 그들의 후손인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 조상들이 영화롭게 여긴 성자 하나님을 당신들이 죽였다’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였습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죽인 성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유대인 당신들은 하나님을 죽인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통렬한 질책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17-19절)]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는 질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17-18)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지금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직간접으로 관여했지만, 그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십니까?”, “당신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였습니다.”라고 통렬하게 질책했던 것은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세워 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시기 위함이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그날에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기로 한 사람이 남자만 5,000명이나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새롭게 되다’의 문자적인 뜻은 ‘위로/하늘로 숨을 쉬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면 ‘새롭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등지고 살며, 세속적 가치관에 빠져 사는 인생에는 ‘새롭게 되는 날’, ‘하늘을 향해 숨을 쉬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않은 것을 움켜쥐어도, 아무리 화려하게 보이는 삶을 살아도, 사람들이 보기에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도, 그 숨을 쉬는 것이 맑은 새벽공기나 울창한 숲속에서의 상큼함이 아니라, 깊은 탄광 속에서 석탄 가루를 마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84장은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입니다. 이 찬송의 2절 가사가 이러합니다. “주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맘이 시원하고 주 명령을 준행하는 자 그 길이 환하겠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생의 길이 바뀌고, 그 삶을 돌이키게 된 사람은 이 찬송의 깊은 의미를 압니다. 하나님께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 때는 무엇을 해도 답답하고, 아무리 큰 것을 갖게 되어도, 또 아무리 많은 것을 누려도 그 마음에 있는 답답함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러움을 표현하는데,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소파에 털썩 앉을 때의 눌림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또한 우리의 발에 등이 되고,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되는 말씀의 조명 없이 살 때는 인생 전체가 어둠 그 자체였고, ‘어둠의 자식들’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이 비췬 후에는 삶이 온통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언약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20-26절)]
[(20-21)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기에서 ‘주’는 성부 하나님을 의미하고, ‘만물을 회복하실 때’는 세상의 종말 곧 하나님의 심판 때를 의미하며,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보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그 종말의 날, 심판의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 하나님 우편에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재림케 하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22-26)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두 번째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구약 성경의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아브라함의 예언을 들어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시며, 사무엘 선지자 이후에 모든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셔서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목이 터지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새롭게 되는 날’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 자신이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고 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지난 삶에 대한 셈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는 손을 잡은 사람을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내미는 손을 잡고서, 그 삶을 돌이키는 사람은 매일 매일을 새롭게 되는 날로 맞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었던 지체장애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했지만, 정작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목할 때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우리 사람은 결코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주님께 주목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매일매일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돌이키는 회개의 삶을 살아감으로, 새롭게 되는 날, 하늘을 향해서 숨을 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다시 오실 주님은 심판주가 되심을 기억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쉰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셈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을 잊지 아니함으로,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도 영원에 잇댄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 은총 속에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장애를 갖고 태어나 한 번도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통로가 되어 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또 당신은 누구에게 하나님의 통로가 되셨습니까?
2. 사람들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혹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려고 했다가 낭패를 당한 일이 있습니까? 그때 얻은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3. 회개하고 그 삶을 주님께로 돌이키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하신 적은 언제였습니까?
4. 주님 대신 주목받으려 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